에세이|Essay/연재글|Series

(가제) 나에게 사과해줄 수 있을까? - 2

여우비오는날 2020. 12. 7. 17:42

#3. 의자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가 나에게 긴히 할 말이 있다며 학교 가장 으슥한 곳으로 불러낸 적이 있었다. 그 아이를 너무 좋아했지만 학교에서 한 두명은 그 아이에게 지독한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겁이 덜컥 났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 아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봄 새싹이 막 필 무렵이었고, 시든 동백꽃이 바닥에서 지저분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학교 옆 뒷동산 어느 작은 오솔길 같은 곳이었다. 입구부터 담배 냄새가 나기 시작하더니 그 아이가 보일 때쯤엔 담배 연기가 자욱해 그 아이 얼굴이 보일락 말락 했다. 옆에는 그 아이와 초등학교 때부터 단짝이었던 다른 여자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나를 좀 챙겨준다는 걸 알고서부터 나에게도 상냥하게 말을 걸어오긴 했지만 그 전엔 눈길 한 번 건넨적 없던 다소 쌀쌀맞은 아이였다. 내가 다가오자 담뱃불을 끈 아이가 별 의미없는 안부말을 몇 마디 건넸다. 정확히 어떤 말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공부 잘 하고있냐는 말처럼 그 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안부였던 것 같다. 나도 뭐 그럭저럭 대충 대답을 하고서 어떤 용건인지 궁금한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봤다. 그 아인 뭐가 고민스러운 건지 쉽게 운을 떼지 못 하더니 나더러 의자매 맺어본 적이 있냐 물었다. 당시에 우린 그걸 '의제' 라고 표현했는데 의제란 또래 아이들끼리 친구 이상으로 자매같은 관계를 맺는 행위를 말한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쯤 그게 한창 유행이었고, 한 번 의제를 맺으면 둘은 단짝을 넘어선 특별한 관계가 되는 것이고, 같은 나이대에서는 한 두명정도로 제한하는 게 암묵적 룰이었다. 나는 그 때까지 특별히 의제 관계를 맺고있는 친구나 선배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친언니가 있었기 때문에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동성인 여자 아이와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것에 익숙치 않기도 했기 때문에 스치듯 어떤 아이가 자신과 의제를 맺자고 했었을 때도 거절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 아이가 나와 의제 맺기를 원한다는 걸 단번에 눈치챘다. 하지만 여기서 너 나랑 의제맺고싶구나? 라고 했다간 이 로맨틱하고 긴장되는 순간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다. 의제라는 말 따위 생전 처음 들어본 것 같은 세상 가장 순진한 얼굴로 없다고 하는 게 맞다는 걸 열 네살의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아이 입가에 쑥스러운 미소가 띠었다. 그 날 이후 수업 시간을 제외하고 우리는 매일 함께 다녔다. 

 

#4. 위험한 놀이기구

물론 둘이서만 다닌 건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그 아이의 '무리' 중 한 명이 된 게 맞다. 그 아이의 무리에는 예쁘고 애교가 많은 아이, 집에 돈이 많은 아이, 한부모 가정의 아이 등 다양한 유형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내가 맡은 캐릭터는 착한 애였던 것 같다. 유일하게 담배를 피지 않았고, 유일하게 학원을 다녔고, 유일하게 교회도 다녔고, 유일하게 성적도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치 아이돌 그룹처럼 그 아이가 자신의 무리를 다양한 색깔로 꾸며보고자 나를 영입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든다. 집에 늦게 들어갈 때 부모님에게 이름 팔 수 있는 나같은 범생이 캐릭터도 필요했던 거다. 아마 그 아이에게는 내가 그 정도의 도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때의 나는 그 아이의 몇 안 되는, 의제라는 특별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기세가 등등해져 같이 일진이라도 된 것 마냥 복도를 지나갈 때 홍해처럼 갈라지는 다른 아이들의 무리를 내려다 보기 시작했다. 하루 아침에 신분 상승한 나는 급식실에 달려가지 않아도 줄 서는 법없이 점심을 먹을 수 있었고, 매점에 가도 돈을 쓰지 않아도 되었으며, 심지어는 다른 아이들이 내 책상에 간식을 놓고가는 등의 조공까지 받았더랬다. 평생을 어느 무리에서도 큰 존재감없이 살아온 나에게는 너무나 짜릿한 변화들이었다. 내가 모르는 아이들이 내 이름을 부르며 인사할 때 나는 연예인이라도 된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 인사해보였고, 그게 또 기분이 너무 좋은데 겉으로 티를 낼 수가 없어서 나에게 인사한 아이와 일부러 눈을 마주쳐 또 인사를 받으려고 애쓰기도 했다. 초등학교 6년동안 남들 하나씩 있다는 별명 하나 가져본 적 없던 내가 이름 대신 반 아이가 지어준 별명으로 불리며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도 다 그 아이의 무리 속에 들어가면서였다. 화려하고 높은 곳에 있는 놀이기구를 하루종일 공짜로 타는 기분이었다. 불행히도 그 놀이기구는 안전성 검사를 받지 않는 불법 놀이기구였지만 말이다.

 

계속.